2023. 07. 17
그동안 새벽에 소리라던지 하는 이유로 잠깐씩 깬 적은 있었지만
오늘은 이상하게 새벽 세시 경에 눈이 떠진 이후로 한동안 잠이 오질 않았다.
더위 때문인가..라기엔 그렇게 덥지도 않았는데 말이다.
하여튼 뒤척이며 몇 시간을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다 해가 밝아올 때쯤 잠이 들었다.
여행지에서 이런 백수 루틴을 경험하다니..
그렇게 잠에서 깨 주섬주섬 옷을 챙겨입고 나온 시간은 아침 9시 반.
늦었지만 그래도 아침은 챙겨 먹어야지 싶어서 호스텔 옆의 마트로 들어갔다.
빵 한 봉지랑 우유를 샀다. 유럽 와서 우유는 거의 처음 먹어보는듯
오늘은 피렌체에서의 마지막 날이다.
내일 밀라노행 기차가 11시에 떠나서 그전까지 시간이 좀 있긴 하지만,
혹시나 로마에서의 다급했던 경험을 또 하긴 싫어서..
두오모 대성당은 물론이고 다른 곳들도 최대한 오늘 다 보려 한다.
아무튼 한 손으로 빵과 우유를 움켜쥐고 먹으면서 길을 나선다.
처음 간 곳은 그저께 가지 못했던 산타 마리아 노벨라 성당.
입구는 성당의 정문이 아니라 옆의 정원을 통해 건물 내부로 들어가게끔 되어 있다.
입장료는 7.5유로이다.
화려한 스테인드글라스와 벽면을 가득 채운 프레스코화가 인상적이다.
프레스코화는 아직 채 마르지 않은 회반죽 벽에 물로 그린 그림을 뜻한다고 한다.
마주보는 벽면에 각각 천국과 지옥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프레스코화 자체가 석회 벽에 그려지다 보니,
시간이 지나 약간 색이 바랜 모습이 외려 그려진지 시간이 많이 지났다는 실감을 들게 한다.
성당의 익랑이라고 하나? 아무튼 한 켠에서 이렇게 기념품들도 팔고 있다.
스테인드글라스를 통과한 햇빛이 바닥에 비친다.
흐려졌지만 원래 형태를 찾을수 있는 것이 재미있는 부분.
사실 이 성당은 이런 내부 건축 말고도 다른 한 작품으로도 유명한데,
최초로 원근법을 사용한 그림인 마사초의 '성 삼위일체'(Trinità)이다.
나도 이것저것 구경하다 이 그림을 찾으려 눈을 돌렸으나..
현재는 운이 없게도 보수 공사 중이었다.
천막 사이로 원본 그림을 봐보려고 한껏 힘썼으나 잘 보이진 않았다.
친절하게도.. 천막 앞부분에 원본 그림을 프린팅 해두었다. 아쉬운 대로 이거라도 찍어 두었다.
그림 앞의 기둥엔 다른 기둥과 달리 특이한 조형물이 붙어있어서 설명을 보니 강대(Pulpito) 라고 한다.
보통 설교나 성경 봉독 등의 목적을 위해 만들어졌다고 한다.
나는 강대라 하면 보통 가슴 높이 정도까지 오는 비스듬한 스탠드를 생각했는데,
예전에는 이런 형태로도 제작되었다는 것은 처음 알았다.
기둥 뒤편에서부터 계단이 기둥을 타고 올라가는 구조가 일반적인 듯 했다.
아무래도 설교를 듣는 입장에서 신부가 뒤에서 입장 퇴장하는 방식이 더 그럴듯해 보일거 같기도 하고..
바닥에 가문의 문장 같은 것들이 새겨져 있다.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성당 세울때 공헌한 피렌체의 가문들이 아닐까 싶다.
템페라라는 물감의 종류로 그려졌다는 십자가.
건물 밖으로 나왔다. 수도원이 있어서 그런지 내가 묵는 호스텔과 거의 유사하게 생긴 모습이다.
아까 내부에서 봤던 것과 유사한 문장들이 새겨져 있지만
도통 무슨 의미인지는 모르겠다. 언뜻 보면 묘 같기도 하고
벽면을 빼곡히 채운 프레스코화들.
이렇게 일부가 훼손되고 표면이 거친 그림들도 있지만, 옛스러워서 오히려 색다른 느낌을 주기도 한다.
성당이 건물 하나만 있는게 아니라 수도원이 같이 있고,
안쪽 구조도 통로가 여러 개인 등 조금 복잡하게 되어 있어서
밖에선 그다지 크지 않게 보였지만 내부 규모는 생각보다 훨씬 넓게 느껴졌다.
두오모의 건립 이전엔 노벨라 성당이 피렌체를 대표하는 성당이었다는데,
확실히 그 사실이 이해가 갈 만큼 볼 것도 많고 여러모로 예상치 못하게 좋은 경험을 했다.
다음으로 간 곳은 두오모.. 가 아니라 메디치 예배당.
사실 ISIC 카드로 할인이 되는 줄 알고 갔으나 알고보니 할인은 유럽연합 나라들의 대학 학생들만 가능했다.
혹시나 해서 직원에게 물어봤으나 돌아온 것은 얄짤없이 안된다는 대답뿐..
아무튼 표를 사서 내부로 들어왔다.
들어가자마자 보이는 작지만 화려한 예배당의 모습.
확실히 메디치 가문의 이름이 있는 만큼 내부 건축이 말도 안되게 화려하다.
이런 정교한 문양도 그림이 아니라 돌을 하나하나 깎아서 새겨 넣었다니
심지어 그게 온 벽면에 다 붙어 있다니 정말로.. 장인정신의 끝이 아닌가 싶다.
미완성된 조각상들. 목 부분에 붙어 있는 건 왜인지 모르게 뱀 같다.
예배당을 다 보고 넘어간 신 성구실은 미켈란젤로가 설계한 공간이라고 한다.
줄리아노의 무덤. 조각상의 근육 표현이 마치 살아 움직이는 듯 하다.
맞은 편에는 로렌초의 무덤이 있다.
여성은 이제 막 잠에서 깨려 하는 새벽의 모습을, 남성은 반면 잠에 들려 하는 황혼의 모습을 나타낸 것이라 한다.
가운데 벽면에는 세 조각상이 있는데,
가운데에는 미켈란젤로의 성모자상, 그리고 그 양옆에는 수호성인들의 조각상이 있다.
밖으로 나오자 이런 실제로 착용 가능한 장신구들을 팔고 있다.
금으로 이런 천과 같은 질감은 어떻게 표현한 것일까..
너무 더운 탓에 잠깐 마트에 들러 음료수를 사고 두오모로 향한다.
어김없이 보이는 수많은 사람들. 정말 발 디딜 틈도 없다.
대성당에도 외벽을 따라 줄이 쫙 늘어섰다. 줄을 안 설 수도 없는 노릇이고 하니 얼른 가서 줄을 선다.
30분 정도를 기다려서 입장. 준이치도 두오모에 올라가려고 이렇게 줄을 섰을려나?
다소 심플한 벽면과 달리 화려한 천장화가 돋보인다.
이 작품은 조르조 바사리, 페데리코 주카리에 의해 그려진 <최후의 심판>.
8개의 면에 빠짐없이 그림이 그려져 있다.
지하로 내려가보면 메디치의 지하 예배당을 볼 수 있다.
이 또한 통합권 패스로 입장이 가능하다.
내부엔 메디치 가문, 피렌체의 귀족들의 무덤을 볼 수 있고
두오모의 돔을 설계한 브루넬레스키도 여기 묻혀져 있다고 한다.
두오모 구경을 마치고 밖으로 나와 산 로렌초 광장 근처의 한 레스토랑으로 들어갔다.
까르보나라 하나를 주문했다. 양이 그리 많진 않아보여도 빵까지 곁들어 먹으니 꽤 배가 불렀다.
식사를 마치고 앞에 한 락밴드 티셔츠 가게가 있길래 들어갔다.
지나가다 몇번 본 곳인데, 개인적으로 유럽 여행 중에(특히 락의 고장인 영국)
락티 가게에 한번 가보고 싶었기 때문에 소화도 시킬겸 들어가봤다.
데프톤즈, 바우하우스, 그레이트풀 데드, 스미스 등등 다양한 밴드 티셔츠들이 많다.
가격을 봤는데, 한장에 45유로..으음.....
공식 티셔츠라고 하니 사실 합리적인 가격에 속하지만,
뭔가 이정도보단 쌀 것 같다고 생각한 때문인지 선뜻 집어들기가 쉽지 않았다.
조금 고민하다 '영국에 가면 이런 가게들은 훨씬 많을 거야!!'라고 애써 생각하며 가게를 나왔다.
그래도 가게 인테리어도 잘 되어 있고, 티셔츠 말고도 LP나 다른 기념품들도 팔고 있으니
굳이 사진 않아도 한번 둘러보는 정도로도 좋을 것 같다.
아무튼 다시, 길을 나서 두오모 대성당 여정의 끝인 예배당에 도착했다.
뮤지엄에서 모작을 봤었던, 기베르티가 제작한 천국의 문.
기베르티와 앞서 말한 브루넬레스키 사이에서는 돔 건축을 두고 다툼이 있었다고 하는데,
결국 돔은 브루넬레스키가 총책임자로 건축하게 되었지만
예배당에서의 문 경쟁에서는 반대로 기베르티가 이겨 이 천국의 문이 만들어졌다고 한다.
기대감을 갖고 안쪽에 들어갔으나.. 내부가 공사 자재들로 다 막혀 있는 바람에 철골들만 잔뜩 보고 나왔다.
오늘만 몇개를 놓친 건지.. 조금 아쉬운 부분이었다.
그래도 일단 구경은 다 마쳤으니 호스텔로 돌아왔다.
내일 밀라노로 떠나기 때문에, 짐도 미리 싸두고 겸사겸사 쉴 예정이다.
할 일을 다 마치고 저녁을 먹으러 밖으로 나왔다.
저녁 장소로 고른 곳은 트리플 앱에서 찾은, 역 주변의 스테이크 전문점인 달오스떼.
음료로는 아페롤 스프리츠를 시켰다. 정말 계속 마셔도 질리지가 않는다.
뒤에 토마토를 올린 바게뜨는 식전빵 이외에도 기본으로 주는 음식인 듯 했다.
올리브오일에 식전빵을 먹고 있을 무렵 나온 500g 티본 스테이크.
며칠동안 고기로 된 식사를 먹지 못했더니 정말 맛있었다.
정신없이 고기를 썰어먹는 도중, 한국말이 상당히 많이 들려오길래 그제서야 고개를 들어 보니 한국인들이 꽤 많았다.
아무래도 한국인들한테 유명한 레스토랑이라 그런가.. 한국인 직원도 계셨고 말이다.
그 전엔 그런 생각을 하진 못했는데, 가족 또는 친구들끼리 여행을 와서 저렇게 즐거운 사람들을 보니
뭔가 조금은 외롭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행 와서 아직은 짧지만 좋은 친구들을 만났지만, 같이 저렇게 여행을 할 순 없는 입장이라 그랬을까..
혼자 오기를 택했으니 어쩔 수 없이 내가 감내해야 하는 부분이지만 말이다.
저녁식사를 마치고 호스텔로 바로 돌아가진 않았다.
피렌체에서의 마지막 일정이 남아있기 때문에.
바로 미켈란젤로 언덕에서 내려다보는 피렌체의 아경이다.
사실 해가 지는 풍경도 보려 했으나 시간이 좀 늦어서.. 그래도 원래 보려 했으니 상관은 없다.
거리가 꽤 되는 곳이라 바삐 걸어갔다.
미켈란젤로 언덕으로 올라가는 길. 친절하게 중간에 이정표가 있다.
10시가 다 되어 드디어 도착을 했다.
올라올 때는 이미 내려오는 사람들이 꽤 많았지만 그래도 막상 와보니 여기도 바글바글했다.
낮에 종탑에 올라가서 볼 때와는 또 다른 풍경이다.
대도시처럼 높은 건물들은 없지만, 어느 대도시보다도 아름다운 밤을 가진 이곳.
밤은 어두워졌지만 등불들이 도시를 따뜻하게 밝혀주는 덕분에, 전혀 어둡지가 않다.
주위에는 연인, 친구들, 가족과 함께 온 사람들로 가득하다.
정말 영화의 한 장면을 그려 놓은 듯한 그런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나도 언젠가는 그들과 함께 이 곳에 돌아와서, 이 풍경을 다시 한번 감상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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